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산 사건 (문단 편집) ==== 광동파의 반발 ==== 후한민 급의 거물 인사를 유폐하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고 장제스의 비서 [[천리푸]]도 반대했으나 장제스는 이제 숨길 수도 없는 일이라며 강행했다. 결국 약법 제정 문제는 장제스의 의도대로 처리될 수 있었으나 중원대전의 패배와 확대회의 결렬로 사분오열된 반장파들은 이를 계기로 재결집하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장제스를 토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쑨커는 장제스가 쑨원이 살아있을 때까지만 해도 별볼일없는 소인배였다고 비판했다. 장제스는 3월 2일, 후한민을 [[미하일 보로딘]]에 비유하며 후한민을 깎아내렸고 후한민의 4가지 죄상에 대해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같은날 장제스는 [[린썬]]을 새 입법원장에, 소원충을 부원장에 임명하고 린썬이 귀국할 때까진 소원충이 대리하도록 했다. 원래도 지방적인 결속력이 강했던 광동파들은 대거 뭉치기 시작하였고 리쭝런이 광동파가 저렇게 철저한 지역관념을 가진 것은 처음 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광동파 구잉펀은 즉각 전보를 보내 항의하였으며 입법원비서장도 사퇴했다. 이에 장제스는 감정을 앞세우는 서생들의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미 중원대전을 비롯한 반발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장제스의 태도는 다소 여유로웠다. 이 자신감에는 장제스가 후한민과 그 추종자들은 자신이 북벌할 동안 입으로만 통일과 건설을 떠들던 서생들 정도로 생각했던 것도 있었다. 그렇다고 후한민 연금에 대한 파장에 대해서 손놓을 수는 없었던 장제스는 광둥의 민심을 살피는 한편, 후한민이 구류되었단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면서 광동파 포섭에 나섰다. 후한민을 감금한 직후 장제스는 이미 [[천밍수]], 구잉펀, [[천지탕]]에게 당, 국가, 인민을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양해를 구했으며 후한민의 연금이 후한민 자신의 의지였다고 하며 약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대의를 위해 자신에게 협력할 것을 주문하였다. 하지만 후한민이 감금에 항의하여 단식하다 두차례나 졸도하였고 치료를 거부했단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은 험악해졌다. 3월 4일 장제스는 입법원 위원들을 불러모아 만찬을 베풀고 후한민이 사직한 경과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후한민 연금 이후로 기능이 정지된 입법원을 진정시키려 했다. 입법위원들은 입법원장 후한민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은 입법원 전체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니 자신들도 처벌하라고 항의했으나 3월 5일 소원충이 입법원장 대리로 부임하면서 입법원이 다시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후한민에 관련된 소문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재차 구잉펀, [[천밍수]]에게 전보를 보내 헛소문이라고 하며 이들을 달랬다. 하지만 광동파의 동요는 계속 심해졌고 광동파 인사들은 잇달아 사직하여 난징을 떠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남은 광동파들의 이반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4월 24일 철도부장 [[쑨커]]와 사법원장 [[왕충후이]]는 상하이로 떠나버렸다. 이에 장제스는 이것이 후한민의 사주와 개조파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쑨커는 후한민만 풀어주면 다 해결된다고 하여 장제스를 화나게 했고 장제스는 쑨커를 아버지의 유촉을 무시하고 반혁명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실 쑨커가 상하이로 떠난 것은 광동파와 장제스를 중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장제스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 장제스는 광동파가 반중앙의 기치를 버릴 것을 요구하였고 광동파는 후한민의 자유회복을 선결과제로 걸어 양자간의 입장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고 쑨커의 중재도 소용이 없었다. 서로를 비방하는 전보들이 연일 빗발쳤고 감정은 과열되었다. 결국 조정에 실패한 [[쑨커]]는 [[천유런]], [[쉬충즈]] 등과 함께 상하이를 떠나 홍콩으로 향했고 왕충후이는 사직하고 헤이그로 가서 국제사법재판관이 되었다. 쑨커가 나름 중재를 시도했다는 것을 모르던 장제스는 쑨원이 이런 멍청이를 낳았다는 것이 탄식스럽다며 쑨커를 더욱 욕했다. 광동파들은 강경하게 후한민의 석방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일주일만에 후한민을 탕산에서 난징의 후한민의 저택으로 옮겨주었다. 하지만 후한민은 여전히 행동상의 자유가 없었으며 외부와 접촉할 수도 없었다. 광동파들이 거듭 후한민 석방을 요구하자 장제스는 혁명당원에게 개인적 자유는 없다는 말로 거부했다. 이에 반발한 구잉펀 등 감찰위원 4인이 4월 30일 장제스 탄핵안을 제출했다. 장제스는 소원충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소원충은 후한민을 국민회의에 출석시켜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이들이 진정될 것이라 진언했고 이에 장제스는 후한민에게 국민회의에 출석하여 광동파의 반발을 봉합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후한민은 자신이 풀려나려면 광동파의 반발이 거세져야만 가능하다고 판단, 당연히 이를 거절했다. 장제스는 탄핵안이 제출되자 감찰위원회를 나라도 당도 모르고 감정만 앞세우는 무지한 자들이라고 일기장에서 비판하면서도 감찰위원회에 자신의 처분을 자청하며 탄핵안에 대한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에 감찰위원회는 탄핵안이 정식 수속을 밟지 않은 것이라며 장제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5월 말이 되자 소원충은 장제스가 다시 후한민을 풀어줄 것을 예상했지만 장제스는 후한민을 난징에 두어야 후한민이 '야심가에게 이용되지 않는다'면서 거부했는데 후한민의 성격상 누구에게 이용당할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핑계였다. 후한민을 해외에 보내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도 나왔지만 장제스는 후한민을 바깥에 내보냈다간 독자적 당부를 조직할 수 있다고 이를 거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